채굴 MINING
근현대 – 임근준 연구자
The Modern Era – Michael Lim
서울시립미술관의 한국 근현대미술 소장선을 보면: 한국성/한국색의 구수하고 큰 뿌리와 새로운 확장의 가능성
국공립미술관 소장선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할까? 앞으로 소장선은 어떻게 가꿔나가야 할까? 서울시립미술관의 소장선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선과 달라야 할까? 차별성을 지녀야 한다면, 그 이유와 근거는 무엇일까?
소장선이 미술관의 핵심이 된다는 점을 상기하자면, 국공립미술관계의 주체들은, 어떤 세계관을 통해 어떤 지향점을 세우고 어떤 가치를 담지한 미술품들을 수집하고 발굴해낼 것인가, 반복해 묻고 답하지 않을 수 없다. 신분이 공무원이건, 준공무원이건, 정년직 큐레이터건 계약직 큐레이터건, 국공립미술관계의 주체들은 시민 사회의 공복으로서 무거운 책임을 떠안는다.

한국의 시민 사회는 국공립미술관 소장선을 통해 어떤 가치를 공유하는가? 특정 미술관의 특정 소장선으로 논의의 폭을 좁히려고 해도, 한국 근현대미술의 정체성과 관련된 여러 가지 큰 질문과 논제가 우르르 쏟아지고야 마는, 종종 모두를 곤란하게 만드는 흥미진진한 질문이다.

역사적 고찰을 요구하기 마련인 미술관 소장선 앞에서 한국/근현대/미술을 호명하면, ‘한국’과 ‘근현대’와 ‘미술’이라는 기표 뒤에서 도사린 여러 이슈들이 안식을 찾지 못한 유령들처럼 고개를 들고 각자의 사연을 떠들기 시작한다.

일단 ‘한국’이란 언표 뒤에선, 분단국가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정체성과 민족적 정체성을 둘러싼 길고 긴 투쟁들이, 눈을 부릅뜨고 으르렁댄다. ‘근현대’라는 기표 뒤에, 식민지 경험과 산업화/민주화 과정을 포괄하는 근대화/현대화의 역사와 근대성/현대성의 조작적 정의에 대한 다각적 논쟁이, 시위대처럼 목청을 높인다. ‘미술’이라는 언표 뒤에서도, 문화적 번역(어)로서의 미술과 미술 행위에 대한 시대별 이해와 토착적 재창안을 둘러싼 여러 실천들이, 양보 없는 주장을 반복해 노래한다.

한국/근현대/미술의 역사에서 제각각 권역을 주장하는 주요 소장품들은, 한국 시민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각각 말을 건네지만, 너무 할 말이 많아서일까, 핵심은 잘 전달되지 않고, 단순 제시와 대면으로 그치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런 상태로는 한국/근현대/미술의 역사가 성취해온 가치가 미래 세대에게 잘 전달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마저 든다. 어떤 대면을 어떻게 주선해야, 오늘과 내일의 관객과 역사는 온당하게 상호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될까?

한편, 한국/근현대/미술의 역사에서 제각각 권역을 주장하는 주요 소장품들을, 아시아 시민 사회를 비롯한 지구 공동체의 여러 구성원들에게 제시하게 되는 경우라면 어떨까? 어떤 이야기를 건네야 좋을까? 어떤 대면을 언제 어떻게 주선해야 옳을까? 한국/근현대/미술의 소장선을 통해, 우리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할 수 있을까?

한국성/한국색의 뿌리와 가지와 열매

국공립미술관 소장선에 임베드(Embed)된 역사관을 미래 지향적 관점에서 추적하고 해체해 재구성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논의의 기준점 가운데 하나가 되는 가치는, 바로 한국성/한국색이다. 그러면, 한국성/한국색 담론은 언제 어디에서 출발해 오늘에 이르고 있을까? 주요 남상점(濫觴點) 가운데 하나는, 식민 조선에서 전개됐던 조선미론 혹은 조선미술 논쟁이다.

1928-31년 시기의 식민 조선에서 조선미(술)론이 전개된 배경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일본색이나 중국색으로부터 구별되는 조선색을 규정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심영섭, 김용준, 오지호는 자율성을 추구하는 순수미술론의 입장에서 조선 향토색을 논했고, 홍득순, 윤희순은 사회 비판적 리얼리즘 미술론의 입장에서 조선 향토색을 논했다. 여기에 힘을 보탠 것이, 조선총독부 주관의 조선미술전람회가 권장했던 ‘조선 향토색’이었다.

조선미술전람회의 일본인 심사위원들이 조선의 향토색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1931년부터였다. 1934년 야마모토 카나에(山本鼎)는 “조선의 자연과 인사 향토색을 선명하게 표출한 작품을 기준으로 심사하는 것”이라고 했고, 1935년 후지시마 타케지(藤島武二)는 “조선 특유의 자연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것이 훌륭한 점으로 이런 입장을 중시하는 것이 좋은 인상을 주었다.”고 했다. 1939년 야자와 겐게츠(矢澤弦月)는 아예 다음과 같이 명확한 심사 기준을 제시했다:

  • 표현에 미숙한 점이 있을지라도 우수한 소질을 엿볼(窺知) 수 있는 것.
  • 반도의 오랜 전통을 묵수(墨守) 하면서 진경을 보인 것.
  • 정확한 자연 관조와 자유롭고도 순진 청신한 표현 수법으로써 제작한 것.
  • 특색 있는 색채와 중후한 기교가 그야말로 반도적인 것.
  • 중앙화단의 작가의 우수 기법을 섭취해서 소화하려고 한 것.
  • 견실한 기법과 진지한 노력에 의한 것.

하지만, 원론적 차원을 맴돌던 조선 향토색 담론을 추상적 차원에서 종합해낸 주인공은, 개성부립박물관장 고유섭(高裕燮, 1905-44)이었다. 그는 1940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글 「조선미술문화의 몇 낱 성격」과 1941년 『춘추』에 기고한 글 「조선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 문제」에서,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 “고수한 작은 맛”과 같은 언어로 조선미술의 특질을 규정하고자 했다.

고유섭에 따르면, 고대 한반도인과 조선인/한국인의 조형이나 미의식을 공히 특징짓는 미감 혹은 감각이, “구수한 큰 맛(Bulky & Savory Taste)”이다. 단아하지만 존재감 면에서 작지 않다는 양의적 모순을 강조하는 것이 ‘큰 맛’이다. (보통 단아하려면 미분된 감관, 즉 작은 맛이 발달해야 함.) 반면 ‘구수한’이라는 수사는, 정제-분화되지 않은 원시적 미감의 세계를 괄호 치는 장치다.

“구수한 큰 맛”과 “고수한 작은 맛”을, 전문가의 언어가 아닌 입말로 고쳐 풀어보면, 변방답게 세련미가 부족하고 촌스럽고 투박하지만, 꽤 호방하고/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데 정감까지 넘쳐서 썩 괜찮다는 뜻이 된다.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 또한 쉽게 풀어 설명할 수 있다. 이는 식민지 지식인이 1. 현대인의 내면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2. 낯선(?) 타자로서의 조선의 예술을 재대면하고, 3. 그것을 긍정하는 미학화 과정을 통해 4. 자신을 구미나 일본의 지식인과는 다른 ‘현대 조선인’으로 업데이트하는 차이화 전략의 하나였다.

물론, 일본 사회의 무한 동력 기관이 된 ‘일본 특질론’과 유사한 전략의 파생물이므로, 당연히 메이지 시대의 일본인들이 자신의 전통문화와 에도 시대의 역사성을 재발견했던 과정을 재추적하면, 조선미론의 논리 형성에 와닿았던 일본 사회로부터의 어떤 영향도 또한 다 가려낼 수 있다. 야마토 민족주의에 부합하는 일본미론(日本美論)의 기초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와 동세대가 문예지 『시라카바(白樺)』(1910-23) 등을 통해 전개한 담론에 바탕을 두고 있었지만, 조선미론과 거의 같은 시기에 형성됐고, 1차 완성은 1943년 서정시인 무로 사이세이(室生犀星, 1889-1962)가 시집 〈일본미론(日本美論)〉을 출간할 때 이뤄졌다. 따라서, 일본 쪽도 그렇게까지 역사가 깊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본미론은, 서구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을 추구하면서도 서구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의 전통을 재발견-재평가해야 하는 타자의 딜레마 속에서 탄생했다. 반면 조선미론은, 일본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을 추구하면서도 일본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의 전통을 재발견-재평가해야 하는 타자의 타자(일본제국의 피식민 주체)의 딜레마 속에서 탄생했다. 문제는 양자 모두, 21세기에 이르러 창조적으로 극복되지 못한 채, 관습적으로 반복 유전되고 있다는 것.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미론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고유섭의 포석은, 지금 보면 다소 어수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심은 씨앗이 김용준 등의 새로운 조선미론으로 자라났고, 더 나아가 김용준의 미론이 북조선의 주체미술론의 근간으로, 또한, 한국의 전후 모더니즘 미술의 논리로까지 활용됐다는 점을 상기하자면, 실로 황당하면서도 감개무량한 면이 없지 않다. 한데, 이 역사적 연관 관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한국인 미술가는 그리 많지 않으니, 퍽 안타까운 일이다.

아무튼, “구수한 큰 맛”의 숨은 핵심은, 변방의 민족의식을 전제로, 우수함을 주장한다는 전략에 있었다. 즉, 변방 문화라 세련미가 부족하고 촌스럽고 투박하지만, 꽤 호방하고 아름다운데 인간미까지 넘쳐서 썩 괜찮다는 뜻엔, ‘몰락해버린 화이질서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탈아입구의 노선에 대응해 서둘러 독자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필사적 존재 긍정의 역사적 긴박함과 절박함이 함께 했다.

한데, 패권을 틀어쥔 문명 세력의 세련미와 변방 문화권의 촌스러움이란 것은 정태가 아니다. 그 둘은 위계로 엮인 유동적 가치 체계로서, 끝없이 밀고 당기며 변화를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가 망하고, 로마 제국이 망하고, 대영 제국이 망했듯이, 인류문화사에 영원한 패권이란 없다.

나는, 구수한 것들 틈에서 이리저리 부대끼는 하위 주체의 예술가들이 언젠가 새로이 승기를 잡는 내일을 상상해보곤 한다. “구수하게 큰 맛”과 “고수하게 작은 맛”을 느끼며, 중심의 몰락과 새로운 대안적 질서의 수립을 꿈꾸며 사는 인생 쪽이, 세련미에 집착하는 완벽주의자의 ‘이미 승리해버린 삶’에 비해, 승률도 높다.

“구수한 큰 맛”의 한국 현대미술과 그 역사

수집-감식가 세대였던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1917) 등으로 놓은 초석 위에서, 미술사학자 고유섭은 조선미술사 연구의 위대한 첫걸음을 내딛었다. 하면, 오늘의 우리는 “구수한 큰 맛”을 평가 기준으로 삼아, 한국 현대미술의 한국성과 그 변화 양태를 추적하고 가늠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미술평론가 이경성을 위시로 삼아온 한국 현대미술관계는 모두 고유섭의 연구로부터 크고 작은 혜택을 입어왔으니, 한국국공립미술관의 역사마저도 그리 평가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해방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전개 과정에서 가장 먼저 “구수한 큰 맛”을 재해석해낸 주역은, 신사실파였다. 신사실파에 합류했던 백영수가 말년에 “신사실파의 시작에 김용준의 역할이 컸다”고 증언했듯이, 김환기 등은 김용준의 영향 아래 민족적 모더니즘을 추구했다. 신사실파의 경우, 한국성의 원점은 대체로 조선 시대 선비의 정신문화에 있었다. 하지만, 조형 언어 차원의 증거가 있어야 했기에, 다소의 논리적 비약을 통해 호출되고 이상화된 오브제가 백자대호, 즉 달 항아리였다.

반면 이응노는, 신사실파처럼 전통의 현대화를 통해 “구수한 큰 맛”을 현대성으로 재창출해냈지만, 스승 김규진의 영향으로 범-동아시아 근대서화의 탈 귀족적 경향을 이어받았다. 유생들에게 영향력을 갖는 선비처럼 행세했던 신사실파 화가들과는 행동 방식 면에서도 달랐다. 결국 이응노는 유일무이한 인간형, 즉 카피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준-초월적 존재가 되고 말았다. (달리 말해, 탈식민 산업화 체제 아래의 한국에서 그는 모방-계승 가능한 유형이 되지 못했다.)

“구수한 큰 맛”을 본격적으로 탐구한 미술 운동은 1957-68년 시기의 한국현대미술을 특징지었던 고색추상(古色抽象)—단순히 앵포르멜이라 불렸던—이었다. 한국식 앵포르멜 운동은, 아주 명확하게 “구수한 큰 맛”으로의 회귀와 재출발 의지를 드러냈다. 따라서 과거 비구상 회화 혹은 추상미술이라는 뜻으로 오용됐던 앵포르멜이라는 호칭은, 역사적 재평가를 통해 수정할 필요도 있다.

고색 추상의 청년 미술가들은, 고려 이전의 한반도 문화에서 모종의 원형성을 도출해 영점의 추상 조형을 구현하고, 그를 통해 식민기 세대의 질서와 가치를 청산하는 동시에, 국제적 전후 모더니즘에 동참한다는 전략을 구사했다. 한데, 한국성의 원점이 이상화된 고대나 중세에 있었기에, 다소간 역사적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었다. (해당 세대가 실제론 전통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반면 단색화가로 변신한 전후 청년 세대 미술가들은, 1973-77년 시기의 한일 우호 질서 속에서 조선 시대 도공의 무심한 노동 과정 따위를 유비 삼아, 유교 도덕화-미학화한 창작 방법을 수립하고, 그를 통해 자기 참조적 연속성을 띠는 의사(Pseudo)-선비적 추상 조형의 세계를 완성해냈다. 문제는, 재해석해낸 “구수한 큰 맛”의 성과를 다시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미론에 가까운 것으로 되돌려 정제-분화시켜버림으로써, 본의 아니게 막다른 지점(변화를 불허하는 결론)에 도달해버리고 말았다는 데 있다. 특히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 1931-2011)는 평문 「白: 韓國 5人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을 통해,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론과 조선미론을 전후 모더니즘의 논리에 맞춰 업데이트함으로써, 단색화의 논리를 때 이른 결말로 이끌고 말았다.

단색화에는 논리적 모순이 있었다. 행위 모델의 참조점은 조선의 도공 등 민중에 놓였지만, 정신적 기준점은 다시 선비를 향했다는 것. 따라서, 민중미술가들은 민중문화 재발견의 흐름을 통해, 농민 등 노동 계급의 민속 문화나 무속 혹은 무속적 불교 문화에서 민족적 정신성의 원형을 찾고, 역사적 발언권을 주장하고자 했다. 오윤, 김봉준 등은 내용과 형식 양쪽 모두에서 부분적으로나마 “구수한 큰 맛”의 한국성을 새로이 정의해내는 미학적 쾌거를 이뤘다. (조형 언어의 차원으로 보면, 오윤의 “구수한 큰 맛”엔 스승 김종영으로부터 대물림한 부분이 적잖았다.)

동시대 미술의 약진 과정에서, 최정화는 타자화된 각종 버내큘러(Vernacular) 문화 요소를 그러모아, 선불교적/의사-선비적/주술적 한국성의 세계를 재구성해내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즉,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호명되지 않는 “구수한 큰 맛”의 세계를 발견해 전유해냈던 것. 반면 박모(박이소)는, 박제화 된 전통의 해석 틀을 해체하고 각 언어(재료)를 어설프고 하찮아 뵈도록 꾸밈으로써, 한국식 모더니즘의 근간이 되는 신화적 선비 전통을 동시대의 버내큘러로 치환해버리는, 해체적 비평의 기획을 시도했다. 최정화와 박모는, 한국적 타자성, 즉 “구수한 큰 맛”의 타자성을 다루는 방식 면에서도 상이했다.

미술사학자 발터 프리들랜더(Walter Friedländer)는, 『이탈리아 회화의 매너리즘과 반매너리즘(Mannerism and Anti-mannerism in Italian Painting)』(1957)에서, 선행 세대의 매너리즘 경향에 반발했던 이탈리아의 미술가들이 성기 르네상스의 원칙으로 회귀하는 전략을 통해 개혁 운동을 모색했던 사례를 분석하며, 미술사에서 반복되는 “할아버지 법칙(Grandfather Law)”이 존재한다고 이야기 한 바 있다. 한데 흥미롭게도, “구수한 큰 맛”의 가치를 재해석해 새로운 한국 현대미술을 일궈내는 일련의 과정에서도, 일종의 “할아버지 법칙”이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이후 조선인/한국인 현대미술가들이, 일본 식민기 선전에 의해 장려됐던 향토색 지향의 근대미술을 극복하기 위해 전통을 재해석할 때에도, 어떤 시점의 어느 계급의 전통을 준거점으로 삼느냐 하는 것은 중차대한 문제였고, 전후 청년 세대는 그와 유사한 기획을 통해 국전 체제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에 나타난 민중 전통의 재발견이라는 새로운 기획에 의해, 전후 모더니즘 또한 부정과 극복의 대상이 됐다. 따라서, 최정화와 박모가 타자적 영역의 “구수한 큰 맛”을 혹은 “구수한 큰 맛”의 타자성을 유희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구수한 큰 맛”은 확장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아직도 그 역사적 함의에 대한 논의와 이해가 태부족 상태라는 것.

오늘의 한국에서 활동하는 현대미술가 가운데 “구수한 큰 맛”이라는 양의적 모순성에 잘 부합하는 이는 누구일까? 겉을 보나 속을 보나 이리 보고 조리 봐도 단아하지만, 끝까지 미분된 원시적 큰 맛, 구수하다 못해 징한 맛을 잃지 않고 있어야 하는데, 2020년대의 현재, 국내의 주요 미술관 전시에서 활약하는 청년 작가군 가운데, “구수한 큰 맛”이라는 동적 가치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고 실험하는 경우를 찾기 쉽지 않다. 작가들의 문제일까? 아니면 큐레이터들의 문제일까?

하면, “구수한 큰 맛”의 차원에서 오늘의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인가?

답은 간단하다. 귀족이나 민중의 전통, 혹은 전통으로 호명되지 않는 전통으로부터 한국성의 지향을 찾으려 했던 과거의 노력들을 모두 부정 혹은 수용하고 또 해체해야 한다. 이제 특정 과거, 특정 계급의 문화에서 한국성/한국색의 원형을 찾지 말고, 관계 맺음과 다층적 관계의 동역학에서 새로운 혼성적 한국성/한국색 혹은 동태로서의 한국적 가치를 찾자고 주장해야 한다.

즉, “구수한 큰 맛”은 이제 다층적 관계 맺음과 그를 통해 창출되는 동적 시공에 있음을 입증해야 하는 것. 더 쉽게 말하면, 한국성/한국색은 한국이라는 권역의 한계를 초월해야 하는 과제 앞에 서 있다.

근미래 한류 콘텐츠 사업의 지향점이,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를 새롭게 잇는 기획자 노릇이어야 하듯이, 한국 현대미술은 한국성/한국색의 해체를 통해, 아시아의 다층적 가치를 재발견하고 공유하는 포용적 네트워크(연결망)의 시공으로 전화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비고: 전 지구적 차원에서 탈식민 하위 주체 청소년 청년들에게 정념 투사의 장을 제공해온 대중문화산업으로서의 K-팝이나, BTS-아미 연속체(BTS-Army Continuum)의 기적적 성공은, 한국성/한국색의 네트워크화를 입증하는 증거이자, 차용 가능한 하나의 모델이 된다.

서울시립미술관 소장선에서 찾은 “구수한 큰 맛”의 동역학
서울시립미술관의 소장선에서 조석진, 안중식으로부터 연원하는 근대서화의 흐름을 추적할 방법은 아직 없다. 고희동과 서화협회의 흐름이나 김규진과 서북 출신 근대서화가들의 흐름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선으로도 그 전모를 알기는 어렵다. 따라서, 국공립미술관 소장선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보다 적극적인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즉, 소장선 내에 존재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을 함께 대차-대조하며 빈칸의 서사를 추동해야,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역사적 동세를 읽어낼 수 있게 된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소장품 총 목록을 연도순으로 모두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나는 “구수한 큰 맛”의 재창출과 전환의 역사를 추적하고자 했다. 변관식, 이응노, 김환기, 유영국, 남관, 천경자, 엄정윤, 권영우, 한영수, 박광진, 손동진, 곽인식, 이우환, 하종현, 황창배, 김호득, 공성훈, Sasa[44], 손동현 등의 작업을 놓고 “구수한 큰 맛”의 개혁 과정을 창조적으로 직조해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소장품 실견 기회는 10점으로 제한된다는 안내를 받았다. 내가 고른 10점(실제론 15점)은 다음과 같았다:
  • 민경갑, 〈부(剖)〉, 1962
  • 하종현, 〈작품 72 (A)〉, 〈작품 72 (B)〉, 1972
  • 주태석, 〈기찻길〉, 1978
  • 곽인식, 〈무제〉, 1980
  • 임충섭, 〈화석 풍경 #1, #2, #3, #4, #5〉, 1985
  • 안상수, 『보고서/보고서-1』(창간호), 1988
  • 황창배, 〈무제〉, 1988
  • 최민화, 〈효박한 이 세상에 불고천명 하단말가 가련한 세상사람 경천순천 하였어라〉, 1989
  • 박현기, 〈무제〉, 1993
  • 이수경, 〈이동식 사원〉, 2008

민경갑의 1962년작 〈부(剖)〉는, 5.16 쿠데타 이후 등장한 군사정부를 등에 업고 수묵 추상 운동으로 한국 근현대미술계의 동양화단을 평정했던 묵림회의 또 다른 실체를 확인하는 기회라는 면에서, 하종현의 1972년작 〈작품 72 (A)〉, 〈작품 72 (B)〉는, 전후 청년 세대의 추상미술가가 앵포르멜 운동의 해체 이후 한시적으로 추구했던 ‘현상학적 사물로서의 실험 조형’이라는 점에서 선택했다.

주태석의 1978년작 〈기찻길〉은, ‘신형상 미술’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화답했던 한국식 극사실주의의 증거물이라는 점에서, 곽인식의 1980년작 〈무제〉는, 포스트-구타이 미술의 문제의식을 반영했던 현상학적 오브제 설치 작업의 초기형이자 수묵 정신/공간의 매체적 확장태였다는 점에서 골랐다.

임충섭의 1985년작 〈화석 풍경 #1, #2, #3, #4, #5〉는, 기억 속 풍경을 고고학자의 자세로 발굴-재조형해 내는, 일련의 연쇄 반응을 담은 한국식 프로세스 아트라는 점에서, 안상수의 1988년작 『보고서/보고서-1』은, 독립출판과 디자인 실험의 한국식 원형이라는 점에서, 황창배의 1988년작 〈무제〉는, 매체적 확장과 서사적/형상적 채묵화의 복권을 추구했던 동시대 한국화의 개화를 알린 작업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취택했다.

최민화의 1989년작 〈효박한 이 세상에 불고천명 하단말가 가련한 세상사람 경천순천 하였어라〉는, 민중미술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전통 형식을 탐구했던 작가의 대표작이라는 점에서, 박현기의 1993년작 〈무제〉는, 원시적 미의식을 재탐구한 한국식 포스트-미니멀리스트의 사례라는 점에서, 이수경의 2008년작 〈이동식 사원〉은, 박제화된 전통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유해 재탐구한 동시대 미술의 몇 안 되는 문제작이라는 점에서 초택했다.

다시 이 가운데, 3-5점의 작품을 골라 간략한 소장품 해제를 쓰도록 요청받았다. 연구자의 입장에서 내가 서울시립미술관의 소장선 연구 프로젝트를 위해 최종 선정한 다섯 점은 다음과 같(았)다:

  • 민경갑, 〈부(剖)〉, 1962
  • 하종현, 〈작품 72 (A)〉, 〈작품 72 (B)〉, 1972
  • 곽인식, 〈무제〉, 1980
  • 황창배, 〈무제〉, 1988
  • 최민화, 〈효박한 이 세상에 불고천명 하단말가 가련한 세상사람 경천순천 하였어라〉, 1989

소장작품 Collection

민경갑 Min, Kyung Kap
부(剖) Severance
1962
화선지에 채색, 먹
Ink and color on
paper
185 × 117.7 cm

유산(酉山) 민경갑(閔庚甲, Min, Kyung Kap, 1933-2018)은 1956년 제5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특선 작가로 입상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반추상 양태의 조형 연구를 전개하더니, 1961년 제10회 국전에는 온전한 추상 수묵화 〈파생〉을 출품했고, 다시 한번 특선 작가가 됐다.

침봉으로 화면에 구멍을 뚫고 닥지를 끓여 화면에 바르는 등 졸괴(拙怪)한 창작 방식의 실천을 통해, 청년 화가는 앵포르멜의 문제의식에 화답하는 현대 한국화의 길을 텄다. 1958년 도불한 이후 1960년부터 동양적 앵포르멜의 길로 나아간 이응노와 비교해도, 1년의 시간차가 존재할 뿐으로, 거장의 뒤를 바짝 쫓았던 셈이다.

1962년 제6회 묵림회전에도 수묵 추상회화 〈작품 H〉를 출품한 기록이 남아 있으니, 완전 추상의 양태로 ‘수묵 추상’의 길을 개척한 주인공은, 묵림회의 리더를 자처했던 서세옥이 아니라, 4살 연하의 민경갑이었다.

민경갑의 1960년대 추상화는 앵포르멜의 경향을 띠었지만, 실험의 향방은 이응노의 경우나 동세대 유화가들의 고색 추상 경향과 달랐다. 유산의 작업은 신남화(新南畵, 중국식 문인화 전통을 메이지 시대의 일본에서 일신한 결과로, 양화의 관점과 기법을 포용하고 화가의 주관성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었다.)의 근대적 어법을 자산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과감한 발묵 효과와 선염법과 마티에르 실험을 결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색채의 사용을 금기시하거나 모노크롬의 화면을 지향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필선으로 토템적 형상을 탐구하는 것으로 시작했던 청년은, 반추상의 산수로 나아가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특유의 몰골 추상을 도출해냈다. 유화로 동양적 추상을 실험했던 자오우키(赵无极, Zao Wou-Ki)의 조형 언어나 구미의 색면추상과 유사한 점이 있었지만, 몰골법의 추상을 시도한 사람은 민경갑이 처음이었다. 서법 추상이나 문자추상의 경우와 대조를 이루는 몰골 추상의 실험이, 충분히 담론되지 못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묵림회는 수묵 추상 운동을 이끌었다고 알려졌지만, 완전 추상 작업이 출품된 경우는 두 번(민경갑과 송영방)에 불과했으므로, 서세옥이 묵림회를 통해 선과 점에서 출발하는 수묵 추상 운동을 이끌었다는 주장은 왜곡된 신화에 가깝다. 서세옥은 1961년 군사정부를 등에 업고 국전 쇄신의 주역이 돼 심사위원 겸 추천작가로서 권력을 행사했다. 자신의 비구상 회화 〈작품〉을 출품하는 동시에, 민경갑의 〈파생〉을 특선작으로 지목했으니, 수묵 추상의 흐름에 기여한 것은 맞다. (1962년엔 원로 교수들을 내치고 스스로 서울대 동양화과의 교수 자리에 올랐다.)

한데, 의사-진화적 연작을 통해 추상의 길을 꾸준히 개척하던 민경갑은, 1968년 다시 반추상과 구상으로 선회한다. 1965년 묵림회의 제9회전을 앞두고 민경갑은 서세옥과 의견 차이로 격돌했는데, 결국 묵림회는 전시를 열지 못하고 해산의 길을 걸었다.

〈부(剖)〉는 1962년 국전 특선작으로, 종이 석장을 이어붙인 바탕 위에 필획으로 구조를 잡고 마티에르와 발묵과 선염의 실험을 펼친 작품이다. 자세히 보면, 뭔가로 찍어서 질감을 구현하고 또 표현한 부분이 두드러지는데, 얼핏 프로타주 기법처럼 뵈기도 하지만, 먹을 묻힌 침봉으로 화면을 두드린 결과였을 것 같다. 종이 왼편 상단엔 구멍이 나서 수선한 흔적도 남아 있다. 패널에 핀으로 고정해놓고 작업했는지, 흘러내린 물감 자욱이 확연하고, 또 우연적 효과에 반응해가며 가필해 구조와 동세를 강화한 부분도 발견할 수 있다. 서화협회 이래의 근대 동양화에선 보기 어려웠던, ‘펜티멘토(Pentimento,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실수나 우연에 의한 것이든 애초의 계획이 수정된 것이든, 중첩한 물감층 너머로 초기의 작업 궤적이 어렴풋이 드러나는 일)’의 몰골법이었다.

‘쪼갤 부’자를 제목으로 삼은 것은 어떻게 해석해볼 수 있을까? ‘쪼개다’ ‘가르다, 깨뜨리다’라는 뜻 외로, ‘다스리다, 처리하다’ ‘명확하다, 명백하다’ ‘똑똑히’ 등의 뜻이 있으니, ‘화면과 재료와 추상적 필획의 질서를 다스리고 처리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편이 더 적절할 듯하다.

민경갑은 2009년 서울시립미술관에 36점의 작품을 기증했는데, 그 가운데 두 점, 즉 1962년작 〈부(剖)〉와 1964년작 〈시공(時空) Ⅱ〉가 1960년대의 완전 추상 작업이다. 작가 개인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작업이지만, 전후 수묵 추상의 역사와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에서도 큰 의의를 지니는 증거물들이다.

한데, 완전 추상으로 간주하는 것이 보통인 이 그림도, 관점에 따라선 반추상으로 해석해볼 여지가 있다. 화면을 지배하는 검은 필선이 이뤄내는 형상을 봉황으로, 그 뒤의 붉은 기운을 구름 사이로 떠오르는 태양으로 독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고: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며 무궁화 문장에 봉황 한 쌍을 추가해 대통령과 청와대의 새로운 문장으로 삼았으니, 1962년 당시 봉황은 정치권력의 상징이 아니었다.)

흥미로운 점은, 검은 필선이 이뤄내는 구조가 김환기의 〈산월〉 연작으로부터의 영향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것. 1990년대 반추상 채색 산수 작업들에선 유영국을 계승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기도 했으니, 민경갑은 신사실파의 후예이기도 했던 셈이다.

민경갑은 몰골 산수를 통해 미분된 “구수한 큰 맛”의 세계를 성공적으로 재창출했지만, 그로부터 제2의 혁신을 일구지는 못했고, 1980년대부터는 니홍가(일본화)의 거장 히라야마 이쿠오(平山郁夫)처럼 대중 친화적 조형 세계를 추구했다.


 

하종현 Ha, Chong Hyun
작품 72 (A) Work 72 (A)
1972
패널, 철사
Panel, wire
122 × 122 cm

하종현 Ha, Chong Hyun
작품 72 (B) Work 72 (B)
1972
패널, 철사, 분사 도료
Panel, wire,
sprayed paint
122 × 122 cm

하종현(河鍾顯, 1935-)은,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뒤 1960년대 초반 앵포르멜(Informel) 양식의 추상 화가로서 화단에 등장했다. 1963년 신상회(新像會)가 주최하고 동아일보가 후원한 제2회 신상전(新像展)에서 출품작 〈작품 C〉(1962)로 최고상을 받으며 주목을 받았고, 1965년 파리비엔날레에 〈부적-A(Amulette-A)〉, 〈부적-B(Amulette-B)〉를 출품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1966년부터는 앵포르멜 화풍과 절연하고 사물로서의 회화라는 주제에 천착하기 시작, 이듬해인 1967년엔 기하학적 추상 이미지를 특징으로 하는 〈탄생〉 연작을 제작했다. (실타래를 부착한 뒤 채색하거나, 캔버스를 가늘게 자른 뒤 돗자리처럼 엮은 것이 특징이다.) 1967년엔 다시 화풍에 변화를 가해 북미의 하드에지(Hard-edge) 회화에 조응하는 듯 뵈는 〈도시 계획 백서(White Paper on Urban Planning)〉 연작을 개시하고, 이 경향을 1969년까지 지속한다. (1968년작 〈도시 계획 백서 68〉은 ‘한국 최초의 기하추상회화’로 꼽히곤 한다.)

1969년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의 창립에 참여한 하종현은, 다시 한번 창작 경향에 변화를 준다. 30대 중반의 나이로 AG 협회장을 맡은 작가는, 용수철, 철사, 철조망, 나무, 밧줄 등을 동원해 재료의 물성이 지닌 힘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실험적 오브제 작업—〈대위(對位)〉(1971), 〈작품 72-1(A)〉(1972), 〈무제 72-3(B)〉(1972) 등—을 시도했다.

이 시기의 작업들은 ‘현상학적 사물로서의 실험 조형’으로 정의 내릴 수 있는데, 전후 일본의 실험미술 운동이었던 네오 다다나 구타이 그룹의 작업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소장품 〈작품 72 (A)〉과 〈작품 72 (B)〉는 해당 시기의 특질, 사물이자 장소로서의 성격을 띠는 회화를 통해, 실존과 실존의 감각을 탐구한다는 문제의식을 잘 보여준다.

A의 경우는 백색의 캔버스 화면에 철적용해놓은 상태 그대로지만, B의 경우는 흑색의 도료를 분사했기 때문에, 형식주의의 논법으로 보면 둘은 전연 다른 작업이 된다. (작업 뒷면에 다른 작업을 제작한 도료 분사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러한 작업 경향은 (유신 독재 원년인) 1973년까지 지속되고, 1974년에 이르면 드디어 작가의 작업 세계를 대표하는 〈접합(Conjunction)〉 연작이 시작된다. 즉, 하종현의 단색화는 박서보, 윤형근에 비해 1년 늦게 시작됐다.

고색추상의 앵포르멜 작업들과 단색화 작업들에서 전통을 재해석하는 작가의 입장과 태도가 분명히 드러나는 것과 달리, 1969-73년 시기의 작업에선 전통과의 연결점이나, “구수한 큰 맛”을 재구현하고자 하는 시도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가 1969년부터 1974년까지 활약했으니, 이러한 AG그룹의 실험미술 경향은, 전통과의 창조적 연결성을 회복하는 단색화의 등장과 함께 붕해했다고 볼 수도 있다.


 

곽인식 Quac, In Sik
무제 Untitled
1980
나무에 먹(2조각, 설치)
India ink on wood
ø106 × 201 cm

1949년 다시 도일(渡日)한 이후 1988년 도쿄에서 작고할 때까지, 주로 일본의 현대예술계에서 활동했던 추상미술가 곽인식은, 행위를 가한 사물의 상태를 통해 현존성(Presentness)의 숭고를 탐구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중반에 걸쳐, 그는 균열과 봉합의 양의적 세계를 결합하는 실험을 전개했다. 그는 이우환의 작업 활동 초기에 적잖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예컨대, 〈작품 63〉(1963)과 같은 곽인식의 깨뜨린 유리 판 작업과, 철판 위에 유리판을 겹치고, 그 위로 자연석을 놓아 파열을 일으키는, 이우환의 수행적 조각 작업 〈현상과 지각 B〉(1969) 사이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미술인은 보기 어렵다.)

하지만, 1976년부터 작가는 자연에서 발견한 사물에 인간의 행위를 보탬으로써 지각과 인식 차원에서 한정 지어진 시공의 영역을 확장해보고자 애썼다. (이런 면에서 그는 습작기에 뵀던 초현실주의적 문제의식이나 경향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그가 화지와 먹과 도기 등을 활용하며 동아시아의 전통적 매체와 서화 문법을 동시에 재창안하고자 했다는 점은 퍽 흥미롭다. 백자를 만드는 도공의 자세 등을 이야기하며 수신(修身)의 추상미술을 주장했던 단색화 작가들을 뛰어넘고 싶었던 것일까?

곽인식은 1980년부터 1985년까지 통나무 표면에 먹을 입히고 절단 행위를 가해 목재의 단면을 드러내는, 설치미술에 가까운 조각 작업을 전개했다. (물리적 작업 과정은 사후 추론으로, 아직 명확한 사실이 규명된 바는 없다. 작가의 관련 글이나 인터뷰도 알려진 것이 없다.) 포스트-모노하의 성향에 속하는 설치미술적 경향으로 볼 수 있지만, 규모 면에서나 회화적 어법과 조각적 어법의 결합이라는 면에서나, 작가의 문제의식을 가장 명쾌하게 보여준다. 아쉬운 점은, 조사와 연구가 미진해 나무에 먹을 입히고 절단해 속을 드러내는 작업이, 언제 어떻게 얼마나 전개됐는지 전모를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간 1980년대의 곽인식을, 평면 회화 작업 중심으로 논해온 것은, 다소 오류가 아닐까 한다.)

〈무제〉는 1980년에 제작된 작품으로, 곽인식은 높이 2m, 지름 약 1m 크기의 통나무의 표면에 먹을 입힌 후 다시 세로 방향으로 가운데를 절단함으로써, 조각적 매스의 내부 단면을 드러냈다. (작업 순서는, 역시 추론이다.) 먹을 가한 표면에서 통나무 본연의 마티에르와 물성이 더 강조되는 가운데, 보존 처리를 가하지 않은 단면이 드러남으로써, 물성의 두 차원이 대비와 합을 이뤘다. 표면에는 분사한 먹이, 단면에는 절단 행위가 가해졌으므로, 행위를 가한 사물의 상태를 통해 현존성의 숭고를 탐구한다는 문제의식은, 꾸준히 유지됐던 셈이기도 했다.

‘비개성적/비표현적 창작 행위를 통해 사물 스스로 (진실을) 말하게 하겠다.’는 곽인식의 문제의식은, 자연의 장소와 결합할 때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작가는 1988년 다소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나는 모든 사물이 표면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흙도, 나무도 종이도…, 모든 것이 표면으로부터 시작된다.” – 곽인식

 

추신1) 영국의 자연주의 조각가 데이비드 내시(David Nash, 1945-)는 1983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 처음으로, 기둥 형태로 취한 통나무 조각의 표면을 태워 숯으로 변성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장소 특정적 목조각에 불을 먹여 부분적/전체적 탄화를 시도함으로써, 내시는 자연계의 환원 주기와 법칙에 부합하는 숯의 조각을 발전시켜나갔다. 해당 시기의 대표작은 〈탄화된 아홉 계단(Nine Charred Steps)〉(1988-89)이다. 일본을 방문했던 데이비드 내시는, 곽인식의 작업을 보고 영감을 얻지 않았을까?

 

추신2) 국립현대미술관에 동종의 목조각 작업 석 점이 소장돼 있다. 공히 제목이 〈작품(Work)〉이고, 제작 연도는 모두 1985년이다.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과의 면밀한 대차 대조가 필요해 뵌다.


 

황창배 Hwang, Chang Bae
무제 Untitled
1988
종이에 수묵채색과 금분
Ink, color and gold dust on paper
168 × 121.5 cm

⁎일부 재료는 분채와 아크릴 물감으로 뵌다.

소정(素丁) 황창배는 현대한국화를 동시대성의 영역으로 이끈 주역으로서, 소위 국전풍 구상 인물화에서 출발한 뒤, 수묵채색의 추상화 연작 실험을 거쳐, 구상과 추상을 혼융한 트랜스아방가르드풍 혹은 신표현주의 양태의 동시대 한국화를 창안하고 구사했다.

1980년대의 황창배에겐 현대한국화를 매체와 형식의 한계선 밖으로 이끌어냈다는 미술사적 공로가 있다. 그러나, 1990년대엔 동시대의 민화적 표현임을 주장하며 일러스트레이션에 가까운 관습적 자유(Freehand) 필획을 반복했고, 동시대 한국화를 신중산층 취향의 안온한 영역으로 이끌고 말았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황창배는 김병종(1953-), 김선두(1958-), 사석원(1960-) 등 아랫세대 한국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한국현대미술관계가 1998년 이후 1980-90년대의 동시대 한국화를 정리하고 평가하는 과업을 잠시 망각하게 되면서, 또 동시대 미술계가 비엔날레와 대안공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작가 본인이 2001년 쉰 다섯의 젊은 나이에 세 상을 뜨게 되면서, 한국화는 21세기 초반 갑자기 시대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32세의 소정은 1978년 청록산수를 추상화한 〈비(秘)51〉로 제27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두각을 나타냈지만, 이미 그는 국전에서 여러 차례 수상한 기대주였다. (1968년 제17회 국전에서 입선한 이래, 입선 총4회, 특선 3회, 문공부장관상 수상 1회를 기록했다.)

1970년대 후반의 〈비(秘)〉 연작은, 에스키스(Esquisse)가 없는 상태에서 직접 머리와 손으로부터 비형상적 상(狀)을 추출해내는, 회화적 사의추상(寫意抽象)의 실험이었는데, 당시엔 종이가 아니라 마포에 수묵담채로 그렸다는 점에서 화제가 됐다. (마로 직조된 천을 삶아 얼룩을 만들고, 그 얼룩을 활용해 추상적 형상들을 도출해내는 소위 연무(煙霧) 기법을 시도했다. 재료의 물성을 십분 활용했으므로, 마포에 동양적 사의의 자세로 유화추상을 전개하던 단색화 작가 윤형근의 경우와 대조를 이뤘다.)

소정은 1981년 동산방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여는데, “진정한 그림이란 조형 의지에 있다.”고 주장하며, 자유분방한 표현으로 가득한 다채색의 한국화를 선뵀다. 때마침 국제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대두하며 추상미술이 퇴조하고 이미지와 서사의 회복이 시도되던 때였으므로, 그의 신작들은 국내외의 맥락에서 모두 시의성을 띠었다.

1980년대에 소정은 문제적 한국화가로서 기존의 매체적 한계선과 형식적 한계선을 뛰어넘기 시작했지만, 국전풍 구상화와, 묵림회 이래의 수묵추상화를 섭렵한 그에겐, 특별한 권위가 부여돼 있었고, 거의 한 번도 비주류로 배척받지 않았다. (그는 서예가 철농(鐵農) 이기우의 제자이자 사위로서, 1970년대 초반 이래 전각 작업을 병행하기도 했다.)

황창배는 1987년 선미술상 수상 기념전으로 두 번째 개인전을 열며 〈숨은 그림 찾기〉 연작을 발표하는데, 이때 그는 국내 화랑계의 스타가 됐다. 1990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개인전을 열며 자신감을 얻은 화가는, 1991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충북 괴산군 청안면에 작업실을 열면서 전업작가의 길을 걸었다.

1990년대의 황창배는 이탈리아의 트랜스아방가르드나, 독일의 신표현주의에 화답하려는 듯, 보다 과감하게 거친 붓질을 구사했고, 구상과 추상을, 서화와 삽화를 넘나들었다. 문제는, 1989년의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1991년의 소비에트 해체 이후, 국제 현대미술계가 전 지구화 시대로 나아가며 의제를 재설정하고 있었다는 것.

1990년대 초중반 당시, 신표현주의로 대표되는 ‘보수적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는 저물고, 전유를 통해 하위주체의 전복성을 추구하는 ‘전위적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가 개막하고 있었다. (박윤영, 김화현, 이소정, 손동현, 이은실 등의 동시대 한국화가들은 후자에 속한다.)

서울시립미술관이 소장한 1988년작 〈무제〉는, 황창배의 최전성기였던 1980년대 후반의 창작 방법을 잘 보여주는, 퍽 아름다운 그림이다. 하면, 〈숨은 그림 찾기〉 연작의 방법과 논리는 무엇이었을까?

동양화단의 관습적 밑그림(河圖)의 폐기를 선언한 화가는, 화선지 석장을 이어 붙여 만든 화면에 담묵과 담채를 무작위로 포수하고, 먹과 분채 등을 이용해 즉흥적 선염 작업을 전개했다. (이러한 1차 작업 과정은 1970년대 중후반의 〈비(秘)〉 연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후 건조된 화면에 다채로운 얼룩들이 나타나는데, 작가는 그 우연적 과결을 로르샤흐 패턴(Rorschach Test Pattern) 삼아, 마음속에 떠오르는 사물과 풍경을 자유롭게 그려나갔다. 이 2차 과정에서 작가의 몸과 손에 익은 전통 혹은 암묵지(Tacit Knowledge)가 빛을 발하곤 했다.

1988년작 〈무제〉의 경우, 황창배는 얼룩들로부터 나뭇등걸과 소나무와 꽃나무와 동산 등을 그려냈는데, 공간을 재구획해 근경과 원경과 새로운 공간으로 연결되는 구멍(채널)들을 창출할 때, 김기창의 바보산수와 같은 붓질을, 마티스의 아라베스크적 음양 전환의 감각을 발휘했다. (완성된 화면의 질서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1980년경 풍경화들을 닮았는데, 당시 호크니는 중국미술사를 공부하며, 화면 하나에 여러 관점과 시공을 종합하는 산수화의 관습적 표현을 동시대적으로 전유해 재창조하고 있었다.) 균제미를 잡는 마지막 과정에서, 화가는 구성적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특정 부분의 색상을 수정하거나 금분으로 장식적 터치를 추가하는 등, ‘멋’을 부렸다. (이는 1990년대 작업의 대주제로 격상되는 ‘흥’으로 연결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유전되는 도가적 이상향을 그려낸 듯한 1988년작 〈무제〉는, 한국성/한국색의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수한 큰 맛’을 다소 고답적인 의사-선비적 취향의 세계로 제한했던 단색화가들과 달리, 황창배는 ‘구수한 큰 맛’을 창조적 ‘멋’과 ‘흥취’의 세계로 재해석해냈다. 작가는 작품 제작 연도를 “4321년” 즉 단기(檀紀)로 적었는데, 이는 평소의 습관이었지만, 그의 민족주의적/동양주의적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1987/1988년의 황창배에 이르러, 비로소 서화협회 이래의 지필묵 세계는, 동시대의 시공을 향해 도약하는 자유를 획득했다고 볼 수 있다. 허나 안타깝게도, 사의적 채색수묵추상으로부터 사의적 신구상회화를 도출시켜냈던 황창배의 성취와 그 역사적 가치를 평가하고, 그의 작업 세계를 발판 삼아 새로이 전위적 도약을 기획해내는 큐레이터나 평론가나 작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물체에는 보이는 면과 안 보이는 면이 있습니다.” —황창배


 

최민화 Choi, Minhwa
효박한 이 세상에 불고천명 하단말가 가련한 세상사람 경천순천 하였어라
How Could One Ignore the Will of the Heaven in This Merciless and Punitive World All the Miserable People of the World Revere the Heaven and Yield to the Heaven’s Will
1989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38 × 290 cm

⁎손상이 있었기 때문인지, 후에 원본 캔버스 천을 새 캔버스 천에 부착해 보강한 뒤 다시 스트레처에 고정했다.

1987년 6월의 민주화 투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이한열 학생—6월 9일 교문 앞 시위에서 입은 부상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7월 5일 세상을 뜬—의 노제는 역사적 분수령을 이뤘다. ‘민주국민장(民主國民葬)’으로 명명된 장례식은, 7월 9일 목요일에 치러졌다. 연세대학교의 학생들은 최민화의 걸개그림 〈이한열 열사 부활도 — 그대 뜬 눈으로〉를 어깨에 이고 신촌 연세대 캠퍼스에서 시청 광장까지 장례 행렬을 이끌었다. 86학번 이한열은, 열혈 운동권 학생이 아닌, 만화 동아리 소속의 평범한 2학년 학생이었다.

연세대의 학생 동아리 ‘만화사랑’의 지도강사를 맡았던 최민화는, 이한열과 인연이 있었기에, 노제용 걸개그림의 제작에 앞장섰다. 7월 8일에야 장례위원회로부터 추모 걸개 제작을 겨우 허락받았고, 동아리 학생들과 함께 밤새 작업해 큰 그림을 완성해냈다. 걸개그림이라고들 했지만, 목재 구조에 부착된 벽화라고 보는 편이 옳았다. 최민화의 이동식 벽화는 다비드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 등 멕시코 벽화 운동의 전례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해 뵀는데, 실제로 작가는 1981년 한국을 떠나 약 1년 2개월 동안 미국과 멕시코에 체류한 바 있었다.

이후 대통령 직선제가 실현되고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자, 30대 중반의 청년이었던 최민화는, 투쟁의 현장에서 효용을 지니는 그림들에서 벗어나, 화가로서의 문제의식과 그에 부합하는 형식을 탐구하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1988년 다소간 지지부진했던 〈부랑〉(1976-88) 연작을 마무리하고, 일 년 뒤 〈분홍〉(1989-99) 연작을 개시하게 되는데, 1989년 작 〈효박한 이 세상에 불고천명 하단말가 가련한 세상사람 경천순천 하였어라〉는 그 이행기에 작가가 어떤 고민을 했었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물이다.

지금까지 최민화가 현대미술가로서 거둔 성취 가운데 으뜸은, 〈분홍〉 연작이다. 탈식민 남성성과 소위 ‘룸펜 멘탈리티(Lumpen Mentality)’가 뒤엉킨, 묘한 마술적 리얼리즘의 낭만적 시공을, 파란만장한 역사의 이면으로서 포착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2000년대에 들어, 회고적/성찰적 역사화 연작들을 개시했다.

〈조선 상고사 메모〉(2003-)는, 켈트족의 가치 회복을 추구하며 상업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고결한 화풍을 추구하고자 애썼던 영국의 라파엘전파처럼, 상상을 통해 상고사에 가시성을 부여하는 실험적 창작이었다. 한편 〈회색 청춘〉(2005-06)은, 신자유주의적 시공에서 유령처럼 배회하는 청춘들을 또 다른 종류의 도시 부랑자(룸펜)로 포착해낸 연작이었다. 반면 〈20세기 연작〉(2006-07)은, 세계사적 사건들을 포착한 유명 보도 사진들을 실사 출력하고 그 위에 가필해 색을 입힘으로써, 역사와 사진과의 관계를 재탐구하려는 시도였다.

2018년에 시작한 〈원스어폰어타임(Once Upon a Time)〉 연작은,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한반도의 고대 이야기를 다뤘다. 〈조선 상고사 메모〉 연작의 확장판에 해당했지만, 화풍이나 색채가 더 유령적으로 바뀌었고, 60대 중후반에 접어든 작가는, 도상 차용을 통해 도상학적 의미 구조를 만드는 일에 더 집중하는 경향을 뵀다. 어떻게 해서든, ‘화가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화를 그려내겠다’는 의지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셈.

1989년 작 〈효박한 이 세상에 불고천명 하단말가 가련한 세상사람 경천순천 하였어라〉는, 신화로 떠도는 역사에 회화적 가시성을 부여하겠다는 꿈이 실제로 결실을 맺은 첫 사례로서, 〈조선 상고사 메모〉 연작에 앞서, 〈원스어폰어타임〉 연작의 뿌리가 되는 작품이다.

최민화는 동학(東學)의 시조 최제우가 지은 천도교(天道敎) 경전 〈용담유사(龍潭遺詞)〉에서 구절을 따왔다. 천도교의 대표적 기도-노래 가운데 하나인 “권학가(勸學歌)”의 가사를 통해, 잊힌 근대사를 형상화하고자 했던 것. 작가는 도상학적 상징 구조를 창출하기 위해 민중미술작가인 오윤의 판화와 그에 대한 연구들을 참고했다고 전한다. (예컨대, 화면 오른편에 쪼그리고 앉은 인물은 오윤의 판화를 거의 그대로 답습했다.) 한데, 린치를 당해 나무에 매달린 채 죽음을 맞은 남자의 모습 등을 보면, 작가가 보도 사진이나 기록 사진에서도 도상을 차용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결과만 놓고 보면 퍽 알레고리의 효과가 강해서, 오히려 이쾌대의 1948년 작 그림들과 더 의미심장한 대조를 이룬다.)

반면, 인물들이 소환된 시공은, 청록색의 괴석과 붉은 몸통을 자랑하는 소나무들이 자라는, 영묘한 기운을 풍기는 미지의 때와 곳이다. 중국의 청록산수 문법을 차용했던 조선왕실의 〈십장생도〉에서 볼 수 있는, 바로 그 이상향의 미장센. 최민화의 그림에서도 해와 산과 소나무는 볼 수 있다. 하지만, 달, 물, 대나무, 거북, 학, 사슴, 불로초, 복숭아는 사라지고 없다. 이미 죽은 것처럼 뵈는 사람들(모두 14명)이, 구천을 떠도는 원혼처럼 그 시공을 대신 차지하고 있다. 미완의 역사 속에서 저들은, 영원한 삶 혹은 대안적 안식을 얻게 된 것일까?

훗날 작가는 이 작업을 설명하면서, ‘제목을 〈동학〉으로 바꿔도 무방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개벽사상의 동학은, 한국의 민주화 운동 세대에겐, 제국주의에 맞선 혁명 정신의 원류로 간주됐다. 그러나, 최민화의 작업 세계에선 이 〈동학〉 그림이, 고대사와 오늘을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맡고 있다.

민중미술가들은 1970년대 후반에 태동했던 민중 문화 재발견의 흐름을 통해, 무속 혹은 무속적 불교 문화 등 비귀족적 전통에서 민족정신의 새로운 원형을 찾고, 그를 통해 역사적 발언권을 주장하고자 했다. 최민화의 경우엔, “구수한 큰 맛”의 한국성을 민중 미학의 차원에서 재창안해낸 김지하와 오윤 등의 전례를 통해, 역사적 상상력의 회복을 꿈꿨다고 볼 수 있다.

 

추신) 〈권학가〉엔 여러 이형(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모두 7종)이 존재하지만, 화가가 참고한 가사는 최제우가 지은 〈권학가〉 가운데에서도 〈용담유사〉에 전하는 버전이었던 것 같다. (비고: 최제우가 한문으로 지은 〈동경대전(東經大全)〉에도 유사한 가사가 실려 있다.) 다음은 〈권학가〉 제6절인데, 그림의 제목은 가사를 재구성해 만든 결과라는 걸 알 수 있다:

“대저 인간 초목(草木) 군생(群生) 사생재천(死生在天) 아닐런가
(무릇 세상의 모든 생명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한울님께 달려 있지 않은가)
불시풍우(不時風雨) 원망해도 임사호천(臨死號天) 아닐런가
(때 아닌 비바람에 한울님을 원망해도 죽음에 임하여 찾는 건 한울님 아닌가)
삼황오제(三皇五帝) 성현(聖賢)들도 경천순천(敬天順天) 아닐런가
(삼황오제와 같은 성현들도 하늘의 뜻을 공경하고 하늘의 명을 따르지 않았던가)
효박(淆薄)한 이 세상에 불고천명(不顧天命) 하단 말가
(어지럽고 각박한 이 세상에 어찌 하늘의 명을 살펴보지 않는단 말인가)
장평갱졸(長平坑卒) 많은 사람 한울님을 우러러서
(억울하게 죽은 많은 사람들도 한울님을 우러러서)
조화(造化) 중에 생겼으니 은덕은 고사하고
(조화로 인해 태어났으니 은덕을 알고 하늘에 제사를 바치고)
근본조차 잊을소냐 가련한 세상사람
(근본을 잊지 말자 가련한 세상사람들아)
각자위심(各自爲心) 하단 말가 경천순천(敬天順天) 하여스라
(제각각 마음을 다르게 먹지 말고 하늘의 뜻을 공경하고 하늘의 명을 따르라)
효박(淆薄)한 이 세상에 불망기본(不忘其本) 하여스라
(어지럽고 각박한 이 세상에 근본이 한울님임을 잊지 말라)”

연구자 Co-Researcher
임근준 (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1995년부터 2000년까지 LGBTQ 운동가이자 현대미술가로 활동하며 한국 사회의 작은 변화를 이끌기도 했다. 『공예와 문화』, 『아트인컬처』, 한국미술연구소, 시공아트 편집장으로 일했다. 저서로는 『예술가처럼 자아를 확장하는 법』(2011), 『이것이 현대적 미술』(2009), 『크레이지 아트, 메이드 인 코리아』(2006) 등이 있다. 2008년 이후 당대미술이 붕괴-해체되는 과정에서, 돌파구 창출에 기여하고자 애썼다. ʻ통사로서의 현대 한국/아시아 미술사를 작성하는 일ʼ을 다음 과업으로 삼고 있다.